저는 빌아르두앵이 쓴 <제4차 십자군 원정기>를 적어도 두 번, 어쩌면 세 번까지 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책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라고 하면 한 페이지도 채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이 수백 권쯤 쌓이다 보면 문득 책장을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기억나는 게 이것밖에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몇 달 전, 저는 콘스턴스 리드가 쓴 <힐베르트 전기>를 읽다가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힐베르트는 학생들에게 사실만 잔뜩 전달하는 수학 강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문제를 완벽하게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해결한 셈이다."
저는 원래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힐베르트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믿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곧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저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은 경험들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조금씩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 경험과 책들이 무엇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힐베르트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잘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 자체는 제 안에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믿음을 어디에서 배웠는지는 완전히 잊어버리더라도 말입니다.
독서와 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꿔 놓습니다.
개별 경험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읽었던 책의 내용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험과 독서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은 그대로 남습니다.
우리의 뇌는 마치 원본 소스 코드를 잃어버린 프로그램과도 같습니다.
프로그램은 분명 잘 작동합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4차 십자군 원정기>를 읽고 무엇을 얻었는지 알고 싶다면, 책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를 볼 것이 아니라 제 머릿속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십자군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베네치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중세 문화와 공성전,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틀 역시 조금씩 바뀌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책을 더 꼼꼼하게 읽었다면 더 많은 내용을 기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서의 성과는 우리가 기억하는 문장의 수보다 훨씬 큽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단순히 마음이 편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재독(再讀)의 가치도 알게 됩니다.
독서와 경험은 모두 "그 순간"의 뇌 상태를 바탕으로 우리 안에 저장됩니다.
같은 책이라도 스무 살에 읽을 때와 마흔 살에 읽을 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단순히 복습이 아닙니다.
새로운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입니다.
예전의 저는 책을 다시 읽는 것을 조금 아깝게 생각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독서를 목공 같은 일과 비슷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목공에서는 같은 작업을 두 번 해야 한다면 처음에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독서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이미 읽은 책'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책도 인생의 다른 시기에 읽으면 전혀 다른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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