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로 일한다고 해서 일을 대충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고등학교 시절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거의 모두 같은 대답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고등학생은 아직 의미 있는 일을 해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증거는 여러분이 지루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덟 살 때는 이렇게까지 지루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놀기'라고 불렀고, 지금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라고 부를 뿐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여덟 살의 나는 뒷마당과 친구 몇 명만 있으면 하루 종일 놀아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점점 시들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은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물론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일만 하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도 아니다.
고등학생들이 흔히 느끼는 이유 모를 권태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인 메스꺼움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성적만 잘 받아서는 안 되잖아요. 비교과 활동도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그 활동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여주기식이라는 것을.
비교과 활동을 위해 스펙을 쌓는 일은 분명 훌륭하다.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진짜 해낸다는 것은 글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우거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히거나,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깊이 이해하거나, 사람 얼굴을 직접 보며 정확하게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것 같은 일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험은 대학 입학원서의 한 줄 스펙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생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중심으로 설계하는 건 위험하다.
왜냐하면 대학 입시에서 여러분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안목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합격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입학사정관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수들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항이다.
나는 그렇게 했고, 그건 실수였다.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은 분명히 받았다.
그래서 그냥 포기해 버렸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뭘 열심히 해 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한 것이다.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어리석었다.
축구 경기에서 상대에게 반칙을 당한 선수가
"반칙이잖아! 규칙 위반이잖아!"
라고 외치며 화를 내고 경기장을 나가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축구에서는 반칙이 늘 일어난다.
반칙을 당했을 때 해야 할 일은 흥분해서 경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 뛰는 것이다.
사실 사회가 여러분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었다.
여러분이 느끼는 것처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중에는 쓸데없는 것도 많다. 그리고 대학 입시 역시 상당 부분 보여주기식이라는 생각도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칙이 그렇듯,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벌인 일은 아니다.
그러니 그냥 계속 뛰어라. 반항은 맹목적인 순응만큼이나 어리석다. 둘 다 결국 남이 정해 준 방식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다른 축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만 하지도 말고, 무조건 거부하지도 마라.
대신 학교를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라. 게다가 꽤 괜찮은 아르바이트다. 오후 3시면 끝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진짜 일은 무엇일까?
모차르트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찾는 것이다.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할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무엇에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가?
우리는 흔히 '적성(aptitude)'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이 단어는 타고난 재능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다.
가장 강력한 적성은 어떤 질문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생각보다 후천적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 생각은 대중문화 속에서 조금 왜곡된 형태로 퍼졌다. 바로 '열정(passion)'이라는 이름으로.
얼마 전 나는 식당 종업원을 구하는 광고에서
"서비스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라는 문구를 봤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열정이 아니다. 서빙하는 일에 그런 감정을 느끼기는 어렵다.
사실 '열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더 좋은 말은 호기심(curiosity)이다.
아이들은 원래 호기심이 많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호기심은 조금 다르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넓지만 얕다.
아무 것이나 보이면 "왜?" 를 묻는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런 호기심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사실 그래야 한다.
모든 것에 계속 "왜?"를 묻고 있으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일을 이루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의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넓고 얕은 호기심이 좁고 깊은 호기심으로 변한다.
벌판처럼 넓게 퍼져 있던 것이 깊은 우물 하나로 바뀌는 것이다.
호기심은 일을 놀이로 바꾼다.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이론은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하는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하나의 신비를 풀고 싶었다.
아마 상대성이론을 직접 만들어 내는 일이 오늘날 학생들이 그것을 시험공부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학교가 심어 주는 가장 위험한 착각 중 하나는 위대한 일을 하려면 엄청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는 믿음이다.
학교에서는 대부분의 과목을 너무 재미없게 가르친다. 그래서 억지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나 역시 대학 초기에 이런 말을 읽고 꽤 놀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에게는 자기 절제력이 없으며, 커피 한 잔조차 참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 나는 뛰어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의 모두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 절제가 강하지 않다.
엄청난 미루기 습관이 있고, 흥미 없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해한다.
내 친구 한 명은 결혼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감사 편지 절반을 보내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는 받은 편지함에 읽지 않은 이메일이 2만 6천 통이나 쌓여 있다.
물론 자기 절제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달리기를 꾸준히 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면 충분하다. 나도 달리기를 나가기 전에는 귀찮을 때가 많다.
하지만 막상 뛰기 시작하면 즐겁다. 며칠 동안 뛰지 않으면 몸이 오히려 찌뿌둥하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비슷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괴로워질 것을 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기 시작할 정도의 자기 절제는 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흥미가 모든 것을 대신한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의지력이 필요하지 않다.
셰익스피어가 이를 악물고 "위대한 문학을 써야 한다."며 억지로 원고를 붙잡고 있었을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재미있어서 썼다. 그래서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 나온 것이다.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가능성 있는 질문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다.
아인슈타인에게 결정적인 순간은 맥스웰 방정식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찾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어떤 분야가 진짜 무엇에 관한 학문인지 이해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학을 예로 들어 보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수학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수학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 거의 닮지 않았다.
위대한 수학자 G. H. Hardy도 고등학생 때는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잘했기 때문에 계속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그는 수학이 정말 흥미로운 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대신,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 친구 한 명은 학교 과제를 해야 할 때마다 투덜거리곤 했다. 그러면 그 친구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게 만들 방법을 찾아."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흥미롭게 만드는 질문을 찾아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와 똑같은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남들은 지나치는 작은 이상함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신비를 본다.
이것은 학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Henry Ford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자동차는 왜 부자들만 살 수 있는 사치품이어야 하지? 생활필수품처럼 대량생산하면 어떻게 될까?"
Franz Beckenbauer의 질문도 비슷했다.
"왜 선수들은 자기 포지션만 지켜야 하지? 수비수가 공격해서 골을 넣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
원문 보기